음악

목포의 눈물·번지없는 주막… 유행가에서 찾은 母國(펌)

바다산바다 2011. 10. 5. 09:18
               (조선일보 2011.10.1) [Why] [김윤덕의 사람人]

        목포의 눈물·번지없는 주막… 유행가에서 찾은 母國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chosun.com 

 

   2011093001052_0.jpg
 
김윤덕기획취재부 차장

            한국가요 100년사 집대성한 재일교포 2세 박찬호씨


      "옛날 노래는 심장이 먼저 듣고… 요즘 노래는 몸이 먼저 듣는 것 같아”

일본 나고야 미나미구(區)의 한 식당. '쓰레빠' 차림에 바지 허리춤을 배 위로 잔뜩 조여 올린 남자가 잰걸음으로 서빙을 한다. 성근 머리숱, 굽은 등이 영락없는 노인이지만 불판 올리고 반찬 나르는 솜씨, 간혹 손님들을 향해 하회탈처럼 껄껄 웃는 미소가 일품이다. 그의 식당 일과는 자정이 다 돼서야 끝이 난다. 종일 고기를 구워낸 철판을 윤이 나도록 닦고 말린 뒤라야 비로소 자기만의 '낙원'으로 돌아간다. 수백 장의 유성기(SP) 음반, LP판들이 신문·잡지들과 뒤엉켜 쌓여 있는 식당 옆 시멘트 창고 방이 이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천국. 그 속에 파묻혀 읽고, 듣고, 흥얼대고, 쓰노라면 어느새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오른다.

박찬호(68)는 나고야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쓰레기 하치장 같은 그 창고방에서 한국가요 100년의 역사를 30년에 걸쳐 집대성한 인물이다. 1894~1980년까지의 한국 대중가요 2366곡과 2084명의 음악인이 수록된 '한국가요사 1·2'(미지북스)가 2년 전 출간됐을 때 우리 대중음악계는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평론가들은 "누구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웠던 방대한 자료들을 치밀한 고증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노작이자, 근현대 대중문화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을 역작"으로 평했다.

음악계에 몸담은 적 없고, 한국에서 살아본 적 없는 그는 대체 무슨 신념으로 그 미련한 작업을 해온 걸까. 낮에는 아내가 생업으로 운영하는 야키니쿠(불고기) 식당에서 종업원 노릇을 하고, 밤에는 먼동이 터올 때까지 음반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는 박찬호를 나고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10월 5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 열리는 '반락(盤樂)―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한국가요사 100년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첫 해설식 콘서트. 선곡(選曲)을 위해 '유성기음반총람'이라는 두꺼운 책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던 그는 턴테이블에 SP판을 올려놓고 그 삐걱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처럼 흔히 들어온 노래들 말고요, 이화자의 '노랫가락',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처럼 그간 푸대접받은 곡들이 주인공이에요. 여기 먼지더미 유성기 음반들이 총출동합니다.(웃음)"

2011093001052_1.jpg
          ▲ 193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된 남인수의 유성기 음반을 들고 박
           찬호씨가 활짝 웃었다. 남인수의 첫 히트곡인 ‘인생극장’과 ‘물방아
          사랑’이 수록돼 있다. 그에게 한국 가요사를 쓰는 일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 김윤덕 기자
내 아버지의 '육자배기'

―낮에는 식당 일 하고, 밤에는 음반을 연구하면 잠은 언제 주무십니까.

"아침 8시에 자서 낮 한두 시에 일어납니다. 자정 이후 일고여덟 시간이 나의 자유시간이지요. 마누라도, 불고기도 나를 구속할 수 없지요.(웃음)"

―요즘엔 어떤 작업 하십니까.

"'한국가요사 1·2'를 일본어로 번역 중인데, 너무나 힘들어요. 우리 노랫말의 시적인 운율을 일본말로 표현하는 게 보통 일 아닙니다. '나'라는 글자만 해도 일본말로 '와타시' 아닙니까? 한 글자가 세 글자로 늘어나니 도통 맛이 안 나요. 컴퓨터랑 매일 밤 격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가요사 1·2'는 한국에서 잘 팔리나요?

"그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저 이 책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재일교포가 한국가요사 100년을 정리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본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난 원래 해방 이전 가요만 정리하려고 했어요. 수난의 민족사를 헤쳐온 민중과 그들의 애환이 절절히 스민 노래들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기도 했겠습니다.

"다섯 살 때 민족차별이란 걸 처음 맛봤어요. 다다미 만드는 집 아이가 나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조센진'이라고 외쳤지요. 학교 다니면서는 내 신세를 저주했어요. 나는 왜 조선사람으로 태어났나, 내 앞날이 참으로 캄캄하다, 하면서. 부모님과 같이 걷기도 싫었어요. 어머니, 아버지의 일본말이 조선사투리로 나오니 부끄러워 친구들도 집에 못 오게 했습니다."

―그러다 운명적으로 한국 가요를 만난 건가요?

"어릴 때 집에 유성기 음반이 몇십 장 있었어요. '목포의 눈물' 같은 유행가, 임방울의 '쑥대머리' 같은 곡이었죠. 모국어를 못하니 어떤 내용인지는 몰랐고 그냥 유성기 손잡이를 돌리며 들었는데, 그 낭랑한 듯 서글픈 노래들이 어린 마음에도 좋았어요. 자라면서는 조선인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 애써 외면했지요."

―아버님이 음악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유행가 듣는 걸 좋아하셨어요.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와 고철고물 수집상으로 돈을 번 아버지는 집안에 유성기부터 들여놓으셨지요. 나는 아버지 부르시던 양산도 민요를 좋아했는데,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창법이 일본식으로만 나와요. 내가 쩔쩔매니까 뭐가 그리 어려우냐 하시면서 당신이 유창하게 불러젖혔지요. 일본 노래는 전혀 못하는 양반이 조선 민요는 어찌 그리 잘하는지. 해마다 아버지 생신 때면 시내 공원으로 벚꽃놀이를 나갔는데, 약주 한 잔 들어가면 아버지가 장구에 맞춰 이상한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어요. 그게 창피해서 난 멀리 떨어져 앉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육자배기'예요. 그걸 배워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선창법을 어릴 때 배워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를 많이 합니다."

"너, 반(半)쪽발이구나!"

―노랫말을 이해하려면 모국어를 배웠어야 할 텐데요.

"그런 자각을 한 때가 불행히도 대학 3학년 때예요. 그나마도 부끄러운 사연이 있습니다. 어머니 고향인 전북 순창에 갔더니 친척들 표정이 좋지 않아요. 외모는 조선놈인데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하니까. 남자어른들 표정에 '너, 반(半)쪽발이구나' 하고 쓰여 있어요. 그때 초등학생이던 이종사촌 여동생이 '말도 못하는 병신!' 하고 쏘아붙여요. 내가 그 정도 말은 알아듣거든요. 굉장한 충격이었지요. 그 '병신' 소리가 약이 되어 그날부터 우리말을 독하게 공부했습니다."

2011093001052_2.jpg
―한국가요사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처음 하신 겁니까.

"1965년 한국에 왔다가 이미자의 음반과 남인수· 백년설 등 흘러간 유행가 열 곡이 담긴 음반을 샀어요. 비행기 안에서 꺼내 보니 원곡을 개사(改詞)한 곡이 10곡 중 8곡이나 돼요. 집에 와서 음반을 틀었더니 부모님이 옛날 듣던 노래와 다르다고 해요. 어째서 그런가 의문을 갖게 된 것이 시작이었지요."

―세월 따라 노랫말이 바뀌기도 하는 것 아닌가요?

"노랫말뿐이 아니에요. 이듬해 다시 한국에 왔다가 '가요생활'이란 잡지를 보게 됐지요. 거기 실린 '손목인의 가요사'를 읽었는데, 그 가요들이 몇 년도에 발표된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아요.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같은 곡들조차 정확한 연대가 없었지요. 그 궁금증이 커져만 갔습니다."

―'오타쿠' 기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노래들이 사랑받았던 당시의 원래 모습을 찾고 싶었어요. 거기엔 분단된 한민족의 역사가 스며 있었지요. 1967년에 나온 한국의 흘러간 노래 해설서에 보면 작곡가 이름이 '김○송'이라고 표기된 게 있어요. 김해송이라는 원곡자의 이름을 감춘 거지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의 남편이자 당대의 유명했던 작곡가인데, 나중에 월북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불온시된 겁니다. 개사도 마찬가지였죠. 아주 많은 노래들이 그렇게 원곡과 전혀 다른 형태로 우리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죠."

―책을 써야겠다 마음먹은 때가 1978년, 그러니까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기관지인 '민족시보'의 편집장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사무실로 조선·동아·한국일보가 배달됐어요. 한국가요와 관련된 기사들에 눈길이 가서 볼 때마다 오려두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해방 전 우리 민족이 함께 불렀던 정한의 노래들을 내 힘으로 정리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쳤습니다. 그날이 마침 새해 시무식에 참석하려고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에서 도쿄로 가는 길이었어요. 후지산을 지날 즈음, 불현듯 '민족시보' 일에 커다란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한민통이란 조직에서 더이상 활동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신 내가 평생을 바쳐 하고 싶은 일이 바로 가요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한민통이라는 조직에서 회의를 느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한민통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에 반대하는 재일교포들이 만든 단체였어요. 민단도 싫고 조총련도 싫었던 젊은이들이 꽤 많이 모여들었어요. 그런데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본국에서 할 일이지 나라 밖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었지요. 뭣보다 한민통이 북한에 대해 유난히 관용적인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목포의 눈물'이 위대한 이유

―가요사 자료는 어떻게 모으셨습니까.

"한국 신문에 소개된 기사와 해방 전 가요 해설서 같은 책들을 탐독했고, 한국에서 수집해온 옛날 LP를 번역했습니다. 가장 큰 도움은 당시 발행된 신문들의 광고였어요. 새 음반이 나오면 신문에 광고를 하던 시절이라 발표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죠. 국내 신문이 폐간됐던 시절의 자료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에서 얻었고요."

―해방 전 가요사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 발표연도도 아주 힘겹게 찾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책 제목으로 사용하려 했을 만큼 중요한 노래인데, 도무지 음반 광고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마침 와세다 선배인 사학자 강덕상으로부터 히토쓰바시대학이 조선일보의 마이크로필름을 소장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죠. 1주일 동안 그 대학 도서관에 살면서 1935년 8월에 실린 '목포의 눈물' 광고를 찾아냈습니다."

―책에는 '목포의 눈물'을 조선 가요사가 낳은 불후의 명작이라고 쓰셨더군요.

"반도 서남단에 있는 항구도시 목포를 일약 낭만과 추억의 고장으로 만든 이 유행가는 사실 일제에 대한 한이 집약된 저항의 노래입니다. 항구란 우리가 일제에게 소중한 양식을 빼앗기는 곳이었고, 토지를 빼앗긴 육친이 타향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적 비애가 서려 있는 이별의 무대였지요. 2절 첫 가사를 아십니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고 시작해요. 그게 임진왜란을 가리키는 겁니다. 실제로 작곡자인 손목인이 이 음반을 발매하기 전 총독부 검열에 걸려 소환당했는데 '원한'과 '원앙'의 발음이 비슷한 데서 온 오해라고 설명한 뒤 빠져나왔다는 일화가 있어요."

 2011093001052_3.jpg

수백장의 SPㆍLP음반을 비롯해 신문 스크랩, 가요 관련 서적과 테이프가 뒤엉켜 있는 박찬호씨의 나고야 작업실. 이곳에서 한국 가요사 100년이 집대성됐다. / 한국문화의집 제공
―일본인 음반 소장자와 레코드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동포가 경영하는 레코드사가 옛날 일본의 오케 레코드사, 태평레코드사의 유성기 음반을 LP음반으로 복각해 판매하고 있었지요. 200장에 가까운 조선 유성기 음반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을 만난 건 천운이었죠. 1938년경 일본 전역에 생중계된 경성방송 라디오 프로에서 고복수와 이난영이 듀엣으로 부른 '신아리랑'을 듣고 우리 가요에 매혹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음반들을 수십 번씩 들으셨다면서요.

"가사(歌詞) 카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음반을 반복해 들으면서 노랫말을 받아 적어야 했지요. 유성기 음반은 잡음이 섞여 정확히 알아듣기 힘든데다 현재와 다른 말이 많고 사투리를 그대로 쓴 노래도 많아서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어요."

―실수도 있었겠습니다.

"황금심의 '만포선 천리길'이란 인기곡이 있어요. 그 노래 2절이 '만철선 눈물설밤 이 편지를 드립니다'로 시작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글쎄요. 만철선이 고유지명 같은데….

"내 딴엔 열심히 듣고 들어서 '만철선 눈물설밤'이라고 결론 내렸고 일본어판에는 그렇게 인쇄돼 나갔는데, 나중에 한국어판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노래의 가사카드를 확보했지요. 거기 보니 '만철선 눈물설밤'이 아니라 '말절반 눈물절반'이에요. 나중에 북한 평양출판사에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들 또한 내 일본판 책을 그대로 베껴 '만철선 눈물설밤'이라고 적고는 그 뜻이 '서러워 눈물 흘리는 밤'이라고 주석까지 달아놨더군요. 내가 죄인이다, 싶었습니다.(웃음)"

'나랏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한국가요사 첫권은 1987년 일본판으로 먼저 나왔습니다. 가요뿐 아니라 신(新)민요, 가곡, 동요까지 망라했더군요.

"단지 가요사를 기록하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나라를 빼앗긴 뒤 우리 민족의 설움과 정한이 담긴 모든 노래를 찾아 그 심정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었지요. 그래서 표제를 '목포의 눈물―한국 민중의 노래와 정한'으로 하고 싶었는데, 일본 출판사가 '한국가요사'라고 해야 독자들이 이해한다니 양보했어요. 아사히·요미우리·마이니치 신문에 서평이 나왔고, 책도 3000부 이상 팔렸습니다."

―'군국가요'도 다루셨더군요.

"암흑시대의 증언이니까요. 아프지만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아닙니까."

박찬호는 말을 잠시 멈추고 턴테이블에 유성기 음반을 한 장 얹었다. 판소리처럼 구성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노랫말이 수상했다. 일본 지원병이 되어 전장에 나가는 한국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최팔근의 노래 '장렬 이인석 상등병'이라고 했다. 이인석은 중일전쟁에 참전한 첫 조선인 지원병으로, 전사한 뒤 그를 칭송하는 나니와부시(일본식 판소리)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 노래 말고도 '아들의 혈서','지원병의 어머니' 같은 군국가요들이 강제 보급됐어요. '혈서지원' 같은 노래에는 '나랏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라는 노랫말까지 등장하지요 ."

―한국가요사에 실린 '군국가요' 부분이 노무현 정부가 주도했던 친일청산작업에 활용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내 책에 그 시대 군국가요를 만들었거나 불렀던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 당시 사정을 잘 모르는 후손들이 당대의 사람들을 무조건 친일이라고 지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유명가수 중에 군국가요 부르지 않은 사람이 드뭅니다. 우리 교포들끼리도 가끔 이야기하는데, 그런 식으로 친일을 추적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모두 친일분자가 됩니다. 그 당시 학교 선생들 모두 친일파로 추궁당해야 하고, 손기정 선수 역시 친일파가 됩니다."

―박찬호의 한국가요사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건, 영문학자이며 음악평론가인 안동림 교수를 통해서였습니다.

"도쿄의 한서점에서 내 책을 우연히 발견한 안 교수님이 그걸 한국판으로 내고 싶다고 연락해왔어요. 단숨에 번역하시더니 1992년에 책을 내더군요. 나운영 같은 작곡가들이 식민지시대 자신의 음악작업들이 한국가요사에 나온다고 무척 좋아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해방 이후 한국가요사도 정리해보라는 거예요.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내 역량 밖이었고, 그건 한국에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2011093001052_4.jpg
―결국 1980년대까지 망라한 한국가요사 2권을 완성하셨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죠. 특히 1970년대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한민통에 소속돼 있으면서 유신반대, 한일회담 반대를 하는 바람에 1969년부터 1992년까지 입국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한국 대중음악을 보고 들은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깜깜시대지요. 한국인들이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해도 돈이 안 되는 책이라 쓰는 사람이 없대요. 이준희 같은 젊은 음악학자들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심장이 먼저 듣는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을 가장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1940년대의 정한이 흠뻑 담겼지요. 시(詩)처럼 간접적이고 애절한 표현이 정말 좋아요.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안저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 같은 정이었어라' 하는 대목에서는 언제고 눈물이 솟구칩니다. 그 살벌하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만주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는데 두 번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얼마나 애통합니까.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어두운 주막에 마주앉은 연인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라 가슴이 아립니다."

―백년설을 좋아하신 모양입니다.

"어릴 때 많이 들어 그런가 봅니다. 그 가수가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창력이 좋다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지요."

―한국에서 가왕(歌王)으로 추앙받는 조용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맑은소리는 아닌데, 그런 목소리를 좋아하는 시대가 왔구나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용필의 노래에 그다지 감격하지는 않습니다만 '한오백년'과 '창밖의 여자'는 좋아합니다. 오히려 저는 장사익의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공연을 보셨습니까.

"나고야에 우리 교포가 하는 작은 술집이 있는데 그날 비가 와서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주인이 좋은 비디오테이프가 있다고 틀어주는데, 그게 장사익이에요. 상여를 보내며 부르는 '허허바다'라는 노래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향토적인 정서, 박력있고 독창적인 창법 말입니다. 3년 전 서울 갔을 때 만났는데 나를 알고 있다고 해서 감격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의 가요들은 연구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전혀요. 'K팝스'라고 불리며 대단한 인기를 모은다던데, 나는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맛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래 세계가 이전 시대와 완전히 바뀐 것 같아요. 옛날 노래는 우리의 심장이 먼저 들었는데, 요즘 노래는 몸과 다리가 먼저 듣는 것 같습니다.(웃음)"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성공한 재일교포 1세대인데, 그 사업을 이어받아 꾸려가시지 그랬습니까.

"밖으로만 나도는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기다리다가 예순도 안 되어 돌아가셨지요. 나중에 서울 조카한테 들었는데, 저 때문에 많이 우셨다고 해요. 면목이 없지요. 아버지의 철판공장은 임대를 줬다가 생계를 위해 식당으로 개조했어요. 아버지 고향이 장수라 '장수원'이라 이름 붙였는데, 경기가 안 좋아 벌이는 시원찮아요. 자식 셋과 나까지 종업원 노릇을 하면서 겨우 꾸려갑니다."

―생전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요.

"영영 한국에서 살 수만 있다면, 하지요. 다만 1년이라도 조국에서 살면서 마음껏 그 공기를 마셔보고 싶어요. 수입이 없으니 지금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꿈으로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백년설 - 번지없는주막


장세정 - 연락선은 떠난다[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