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긍모 제3대해군참모총장묘 참배

바다산바다 2014. 9. 26. 08:38


2014.9.25(목)오늘은 박찬극제독님과 함께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정긍모(鄭兢謨)

제3대해군참모총장님 묘소를 참배하다. 용산발 새마을열차,막힘없는 초가을

지방도를 달리는 차창과 천안.아산~용산간 질주하는 KTX산천 차창으로 흐르는 풍요의

상징 황금벌판 풍경은 생존시 부하사랑의 정이 특별하셨던 고인에대한 박제독님의

 기억이 남 다르셨던 기억들과 오버랩되어 기억되시었을 것이다.

 

아래는 예산군지와 비문에서 에서 옮겨온  정긍모제독님의 소개이다.

 

정긍모신도비(鄭兢謨神道碑)

 

정공의 이름은 긍모요 호는매당이다,본관은 동래이며 십대조 영의정을 지내신 태화 호는 양파의 후손이다.정공은 1914년  충남 에산군 예산읍 간양리에서 정인우씨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일찍부터 재주가 영특하여 나라걱정에 몰두하여 성실한 인품과 탁월한 기량으로 바다에 뜻을 두어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해양보국의 충정으로 동지들과 더불어 십일월 십일일 해방병단을 창설하니 이가 고 우리해군의 기둥이며 모체이다.

1946년 초대 묵호경비부사령관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일선기지사령관직을 두루엮임하면서 해군의 귀감으로 지역방위와 공비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6.25 동란중에는 이동기지 사령관 통제부사령관등 주요 요직을 맡아  제해권의 확보와 북괴침략군 격퇴에  ㅣㅊ나는 공적을 이룩하였고 1954년 십일월 마침내 제3대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서는 우리해군의 전력강화와 군사교육훈련에 주력하는 한편 군장비의 쇄신과 함께 함대정비보강에 착수하여 오늘날 우리해군의 위용을 갖추는데 굳은 기반을 닦았다.

1959년 해군총장으로 예편하여 이듬해인 60년에는 초대 참의원 위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1980년에는 해군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이 나라의 해양정책에 크게 공헌하던중에  1980년 12월 23일 향년 67세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선종하셨다.정긍모 제독은 이와같이 해양계의 뛰어난 선각자로 우리나라 해군창설에 선도적인 임무를 다하였고 대한민국 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남다른 지도역량을 기울여 나라에 이바지함이 지극하였으므로 군인으로서 으뜸의 영예인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을지 충무 화랑 보국등 무훈을 수공하였다.

후인이 기록에서 살피려니와 공은 초지일관 우리나라 해군에 일생을 바친공인이지마는 그는 가정에서는 원만하고 인자한 ㅏ자이었고 사회에서는 근엄하고 정직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올바르게 살며 군인으로서 장성으로서의 경직이나 오만을 찾아 볼수 없었다. 이러한 공의 소박하고 거짓없는 인품과 성실하고 강직한 성격은 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당신의 맡은바 임무에 충실과 안전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료와 부하 사랑하기를 가족과 같이 하여 세인의 신임과 존경을 한 몸에 차지했다.공이 일생 동안 염원하던 남북통일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으나 공을 기리고 경모하던 후학과 국민들이 공의 뜻을 이어 받아 매진하고 있으니 부디 하늘나라 주님의 품안에 편히쉬시라.

 

1930.4 예산공립보통학교

1939.3. 해군군사반 수료

1945.6 한국해안경비대 묵호기지사령관

1947.8 인천기지 사령관

1948.5 목포기지사령관 이동기지사령관

1950.11 진해통제부사령관

1954.11제 3대해군참모총장

1960. 7초대 참의원 당선

1980 국방군사정책자문위원 겸 해군정책 위원장

1961 년 신유6월  일

김동리 지음 심우석 씀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비밀병기_잠수항모  (0) 2016.08.23
대마도  (0) 2015.04.26
임진왜란  (0) 2014.02.18
독도  (0) 2014.01.01
삼국지(벽화)  (0) 2008.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