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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짧다

바다산바다 2007. 10. 30. 15:07

-서두르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짧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환생을 유목하고 있었다.


 



정처없는 바람과 구름의 순례길.

죽어서도 나는 티베트를 여행해야 하리라.


 











 



 



차마고도(茶馬古道)의 길은 내내 까마득하고 위태로웠다.

하늘과 맞닿은 가혹한 천산협로이자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문명통로인 차마고도에서

나는 나약한 길짐승의 운명을 절감했다.


한바탕 쏟아진 소낙비로 벼랑에 걸쳐 있던 실오라기 같은 길은

뭉텅뭉텅 잘려나갔으며,

예고 없는 산사태가 몇 번이나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겨우겨우 길을 열고 다시 차마고도를 따라 달려 갈 때,

비로소 나는 길에게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길의 신과 하늘의 도움 없이는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더욱 낮게 엎드리게 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었다.

강물과 언덕, 나무와 바위, 야크와 당나귀에게도 신은 깃들어 있었다.

골짜기에 올라앉은 손바닥만한 마을은 언제나 한 점 종교처럼 빛났고,

주위를 물리치고 우뚝 솟아난 만년설 봉우리는

붓다가 가진 '보호의 눈'처럼 주변을 살폈다.

가는 동안 끊임없이 티베트는 내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의 언어였지만,

가끔은 구체적인 몸짓과 신호를 보내왔고,

때때로 풍경의 은유로 말을 걸어왔다.

나무들의 오체투지 혹은 바람이 읽어주는 경전소리 같은 것들,

티베트의 흙이 빚어낸 풍경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고향을 보았으며,순진한 옛날로 되돌아갔다.




 








누군가는 티베트에서 '허무와 폐허'를 보았다 하고,

누군가는 '영혼의 풍경'을 보았다고 하며,

또 누군가는 '오래된 미래'를 보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본 것일뿐, 본 것과 체험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티베트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을 뿐, 그 속으로 철퍽 뛰어들지는 못했다.

내가 받아적은 것들은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왜곡할 수도 있는 '눈에 보이는 풍경들'에 불과하다.

누군가 내게 '티베트'나 '차마고도'에 대해 물어오다면,

여전히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여전히 그것의 실체는 흐릿하고, 희미한 내 의식 속에서만 깜박거릴 뿐이다.


 



 







차마고도란 것이 그렇다. 그건 그냥 길일 뿐이다.

실크로도보다 더 복잡한 무역로이고,

세상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문명통로이며,

가혹한 말의 길이자 향긋한 차의 길이라는 표현들은

역사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이다.

길 위에서는 그것을 증명할 만한 것들이 너무나 희박하고, 건조하며,

미약할 따름이다.


사실 나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들은

티베트의 황톳빛 풍경과 먼지 날리는 길과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고원의 설산과 계곡의 마을과

사원을 향해 걸어가는 희미한 사람들이다.

차마고도와 상관없이 그것들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벅차게 눈물겨웠다.

티베트는 내게 관념이지만, 티베트의 풍경은 현실이었다.












 


내 앞에서 구름은 깃발처럼 펄럭였고, 바람은 급박하게 회오리쳤다.

산은 산대로 출렁거렸으며, 물은 물대로 가랑이쳤다.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하고, 과분했다.

길에서 딱히 말 고삐를 당기며 가는 마방을 만나거나,

소금짐을 실은 당나귀를 만나지 않더라도

허름한 식당에서 따라주는 맑은 차 한잔이면 가뿐 했다.


티베트가 내게 보여준 것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

오래된 풍경과 정서와 가치와 삶의 방식들이었다. 오염되고 변질된 개발국의 모습이 아닌

미개발된 천연하고 순진한 지구의 모습이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을

그들은 동경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지속된 외계의 간섭과 현대화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땅과 삶과 종교의 유대관계는 여전히 견고하고 끈끈했다.

그것은 그들의 암울하고 불행한 정치 현실과

사회적 환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을에는 어김없이 사원이 있었고, 누구의 마음에나 달라이 라마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번 생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면 또 다른 생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렇게 느긋하고, 욕심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복된 미래를 위해 부진한 현실을 견디는 것이다.

그 옛날 길에서 일생을 보낸 차마고도의 마방과 장사치도 그러했으리라.

어떤 운명 같은 사명이 그들을 가파른 벼랑길로 내몰았을 것이다.






 





 

운명이란 것이 그렇다.

고된 자는 끝까지 고되고, 떠도는 자는 끝까지 떠돌게 된다.

어쩌면 나도 운명 같은 역마살이 나를 차마고도로 데려갔으리라.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그렇게 나는 믿고 싶다.

여행자가 되어 티베트로 끌려가는 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사실 차마고도 여행은 다른 모든 여행보다 쉽지 않은 여행임에는 분명하다.

차마고도에서는 미리 짜두었던 계획과 목표가 무산되기 십상이다.

가다가 산사태를 만나거나 염소떼를 만날 수도,

차가 고장 나거나 몸이 고장 날 수도 있다.

때로는 너무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돼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차마고도에서는 그것 또한 여행의 일부이며,

그것을 탓해서는 안 된다.











 


 

애당초 차마고도를 따라가는 여행은 '느림'과 '불편함'을 경험하는 일이다.

차마고도에서 너무 늦게 가는 것을 탓한다면,

차마고도를 따라갈 이유가 없다.

서울에서 출근하듯 여행하기를 바라는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짧다.

마땅치 않은 숙소를 탓하거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탓해서도 안 된다.

본래 여행이란 제 입맛대로 굴러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차마고도에서 나는 느림과 불편과

덜컹거림과 숨참을 즐긴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차마고도의 날들이 꿈만 같다.

때로 방송이나 지면에서 티베트의 황톳빛 풍경이 펼쳐질 때마다

나는 처음처럼 생경하게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저 길 위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만 굽이치고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았다.

시간이 지난 강물은 언제나 맹렬하게 흘러서

나는 또 배 맬 자리를 찾지 못하고 표류할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글: 이용한(시인)/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길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