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47구간(여원재~입망치~수정봉~고기리~고리봉)

바다산바다 2008. 1. 21. 20:40

여원재는 24번 국도가 지나가는 백두대간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다. 여원재에서 복성이재에 이르는 운봉고원은 목기와 벅수, 판소리로 유명한 곳이다. 백두대간과 지리산 서북능선이 운봉을 감싸고 있어서 운성(雲城 )이라고도 하며 “운성대장군”이라는 벅수(돌이나 나무로 만든 장승)가 여원재에 새워져 있다.

 

 

백두대간 길을 밟으면서 지나치는 곳의 얽힌 이야기들을 섭렵해봄도  힘들고 지루할수있는 산행길에

청량제라면 청량제라할수 있겠다.  다음은 여원재에 얽힌 '산 사랑방'의 글을 옮겨 본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끝임 없이 행해지고 있을 때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에 얽힌

슬픈 전설은 지나가는 대간꾼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밥과 술을 파는

신세였지만 “어찌 내가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라”하며 왜놈이 만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오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왜구의 노략질과 약탈이 극심했던 1380년 우왕6년 양광(경기, 충청),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남원에서 배극렴과 합류 왜구 토벌에 나선다. 팔랑치를 넘어온 불사신으로 소문난 왜장 아지발도를

상대하기 위해 여원재를 넘을 적에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내 원수를 같아~~~ 주~~”하며 이렇게 저렇게 ~~~

전략을 가르쳐 준다. 이성계가 깜작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그 전락이 무엇이었을까?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황산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속에서 백발여인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을까?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감동했는지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이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개 했다.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 지르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신궁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하던 왜구의 적장이 죽는 순간이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 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 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이 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이 주모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후 태조 이성계는 고갯마루에 ‘여원’이란

사당을 짖고 그 여인의 넋을 달랬고 후세 사람이 이 고개를 ‘여원치’라고 불렸으며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

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 "

 뒤론 고남산 마루금이,옆으론 이백면의  분지가 넓직하다

 '2008.1.20.일요일 아침0705시 압구정동을 출발한 우릴태운 버스는 도중 인삼휴계소에서 20분간을 정차하고 10시50분 여원재에 도착

1100시 부터 간단한 준비를 끝내고 바로 산행에 들다.1124분 700m 고지 가파른 오르막에서 잠시휴식, 뒤돌아 보니 2007.12.16일 거쳐 온

고남산이 멀리서 아련하다

 

 2007년 12월16일 지나온 백두46구간산행중 고남산 정상에서 운봉읍을 배경으로

 

 

 신형리무진 버스의 신차냄새 증후군으로 고심한 병우와 아직 허리가 불편한 정호가 후미에서 추격한다.

 700 고지 정상에서

 

 입망치로 하산중  지나온 700고지 정상을 재 전망

 

 

 입망치에서 장헌수 선배님과함께 기념사진을

17회 참가는 6명으로 ,기수 치고는 많이 참가한 편이다

입망치에서부터 다시 수정봉을 향하여 오르막길에...점점멀어지는 여원재와 700고지 능선이 눈에 온다

 

1239시 수정봉 정상에서 선두구릅과 상봉 즐거운 점심을 함께하다

 

 

 

 주형이의 게장 한정식 메뉴가 일품으로 정작 주인은 나눠 주느라 별로 먹지 못한듯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수정봉 정상에서 하산 출발전에 인원파악차 또 한장...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지는 않은 고인돌이

 1357시 가재마을 뒷 동산엔 당산제전이 잘 생긴 소나무 아래 정성스레 만들어 져 부락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모임의 장소로

 

 이미 금일 최종 목표인 큰고리봉 경유 정령치는 도로 결빙으로 인하여 우릴 픽업할 버스가 통행제한으로 못가니

 다음 기회로 연기가 확정 되어 사실상 하산이 완료된 이 지점이 오늘의 산행 종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다

 

 이 정도 소나무라면 보호수로서의 지위를 누릴 만한  잘생긴 소나무 4구루

 백두대간 하면 초행자라면 누구나 험준한 산령을 상상할것이지만 이곳 주촌리에 당도하면 혹시 길을 잃은것은 아닌것인가 의문을 갖는 산행인들도 있음직한곳이다.

'후기 고산자 김정호에 의해 완성된 목판22첩 대동여지도는 지리학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이다.

당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국가 기밀사항으로 발간된 책자 및 목판까지 압수되어 시중에 없는듯 하였으나

근래에 들어 고문서 서점에서 여암 신경준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백두대간: 우리나라 한반도 최고봉 백두산에서-설악-덕유-지리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백두대간은

산경표 원리에 의해 [산자분수령]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다 즉 마루금은 물을 가른다 하였으니

 백두산-지리산은 장대한 맥이 하나로 이어져 물을 가르고 있다.

즉 마루금 자체에 실개천하나 없다는 사실이다.

대동여지지 및 동국명산기 많은 문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시)

 ①강릉부 서쪽으로 몇십리에 청봉이 있고 마루금따라 서편으로 점봉산이다. ②무주감영 동쪽 몇 십리에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이 있고 ,

향적봉 아래로 몇리에 무룡산이 있으며 남쪽 아래 몇리에 서봉이 자리한다. ③지리산 최고봉은 천왕봉이며 서편으로 반야봉과 노고단이 있다.'

상기와 같이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많은 산명들이 옛 이름을 잊은체 존립하고 있는 실정이며 학자들이 문헌을 검토해 하나하나 정비해 나아가고 있다.

 만복대-정령치-고리봉에서 세걸산-바래봉 방향으로 간다면 덕두산 지나 인월면에서 지맥이 다하므로

연결이 않된다. 또한 바래봉-고기리로 떨어져 주촌-덕치마을 노치샘 인근은 아주 낮은지역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동서로 확연히 물길을 가르고 있다. 따라서 이곳 주촌리는 원시적으로 낮은 산이 고리처럼 연결하고 있다

백두대간 길 같지 않은 확실한 대간 길인 셈이다!

 노치샘에서...물의 빛갈은 정갈해 보였다.수질 검사서를 찾아 보려 하였으나 발견할수 없어 수질의 상태는 파악할수 없었다.

 

 수정봉에서 가재마을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뒤로하고

 귀경길 버스안 오늘 처음 백두대간 길에 든 후배가 중간 계획변경으로 산행보단 버스안 행사(?)가 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듯하다는 아리송한 코멘트에 ...뒷 좌석에선 다음 대간 부터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해주겠다는 전직 단장의 리플이 즉각적으로 달리고...암튼 진눈개비내리는 고속도로 귀경 버스안은 선 후배간 친교의 자리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