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 隆陵 사적제206호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장조莊祖(1735-1762)와 그의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1735-1815)
홍씨가 묻힌 곳이다.1749년(영조25년)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하면서,정치적견해를 달리하는 노론老論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비貞純王妃 김씨,숙의淑儀문씨등의 무고에 의하여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38년 (1762)
뒤주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그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광무3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장조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拜峯山(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아래에있었는데
정조가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圓이라 하였고,장조로 추존된뒤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높혔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1744년(영조20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장조가 세상을 떠난뒤
혜빈惠嬪,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惠慶으로 올렸고,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황후에 추존되었다.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일생을자서전自敍傳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閑中錄을 남겨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건릉健陵 사적제206호
건릉은 정조正祖(1776-1800:재위 ,1752-1800)와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
김씨가 묻힌 곳이다.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영조35년)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
孝章世子(추존 眞宗)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1775년(영조51년)연로한 영조를
위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올랐다.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재를 재정비
하기 위하여 영조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
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쳤다.또한 임진자
壬辰字.정유자丁酉字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속오례의續五禮儀,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재위기간은 정조의 학문적 소양에 터전한 적극적인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중국의
건륭乾隆문화의 영향등으로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이루어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효의왕후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로 1762년 (영조38년)세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1821년(순조21년)창경궁昌慶宮에서 승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