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트래킹

바다산바다 2012. 7. 20. 07:48

   2012.7.18(수) 오후늦게 서해안에 태풍이 상륙할것이란 기상예보가 내려서 인지 용문행

전철 안이 넉넉하다. 차창을 스치는  흔들리는  녹색의 논 벼 물결이 먼 산등과 잘 어울려 지는

차창밖 풍경은 오늘처럼 여유있는 차안 에서 즐기는 借景의 연속이다.

 

용문역에 내리면 용문사까지 운행하는 여러가지 교통편이 있으나 ,작년도에 한번 이용한

적이 있는 한 음식점의 차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태풍이 본격 상륙하기 전이라 하늘은

짙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듯하니 용문산을 찾는 객들의 발걸음도 뜸하다.

 

 마침 점심때도 되고   차편도 무료로 이용하였으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그냥 이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하기로 하다. 지난번엔 용문산 정상을 오르기위하여 왔으나,오늘은 늦게

도착하여 정상은 생략하고 마당바위까지 만 가서 ,하산시 상원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될듯

하다는 생각에 여유를 부려본다. 산행도 하여야 하니 알콜은 자제하려하였으나 앞팀으로

서브되는 옹기속 동동주가  주문한  더덕구이 정식과 잘 어울릴듯하여 삼천원에 한 옹기를

추가하니 한 사발 후 취기가 돌아 더 이상 못하고 남은 두사발은 내려올때 어차피 이 집

앞에서 귀로행 차편을 해결하여야 하니 맡겨 두라고 하려니 어쩐지 째째한듯하고, 처음 부터

많아 보였던 옹기속 동동주의 양에 질려 많아보인다  하니 남겨놓으시면 제가 마시죠 하던

웨이트레스의 지나치던 말이 생각난다.

 

암튼, 적당한 산행전 반주가 처음인 상태로 용문산 정상 방향으로 향하는데,작년에 보았던

수령 1000~1500 여년 추정되는 용문산 은행나무를 옆으로 끼고 본격적인 산행루트로 접어드

는데 평일에 태풍예보도 있으니 산행객은 별로 없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냉기에 축축한 습기

용문산 일대에서 출현 한다는 멧돼지 오소리등등 주의 간판이 오늘따라 신경이 간다. 용문산

광장으로 접근하면서 올려보았던 정상 가섭봉에 짙게 드리운 구름이 걷칠 기미가 안보인다.

 

전에 없던 계곡 철조망이 거의 끝나는 시점부터 눈에 익은 계곡의 모습들이 그 간의 장맛 비

덕에 수량도 풍부하고 먼지 한점 없이 깨끗한 상태로 맞이한다. 옛날의 풍류객은 화선지에

묵화로 옮기지만 오늘 난 열심히 디카로 옮긴다.

 

아랫 동네에서 마신 동동주 기운이 거의 빠져 갈 즈음  마당 바위가 아직 700~800 여 미터

지점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맞아 더 이상 진행을 멈추고 원점 회귀에들다. 올것이 오는 구나

미련 없이 하산 하여 용문사 처마밑에서  잠시 쉬어 가는데 대웅전 건너편 법당에서 불자들의

불가 연습소리가 은은히 귓전을 울린다. 산사의 경건함을 새삼 느끼며 귀로에 들다.

(못다한 사족은 아래 동영상 2편 참조)

 










 
















 

 

 

 

 

 

 

 

  

용문사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한 컷

 

용문사 은행나무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심은 것이라는 설과,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것이 ]

뿌리가 냐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거듭되는 병화와 전란 속에서도 붙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 하여 "천왕목" 이라고도 불렀고,조선 세종때에는 정3품이상의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

 받은 명목이다. 수령이 약 1100~15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42m,줄기 둘레 11m 를 넘어 동양 유실수

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고종승하시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미리 알려

주는 영험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때 일본군이 은행 나무를 자르려고 한 도끼자국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1962년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현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

한 뒤 고종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의병의 근겆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 태

웠다.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이후  불사리탑과 요사채를  세웠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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