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

바다산바다 2008. 10. 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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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700 M 피아골 구계포 계곡에서 

 2008.10.26 길 산악회와 피아골 산행을 함께하였다. 공교롭게도 고교 선후배 합동 모후산 산행일과 겹치게되었지만,

금년 5월16~17 지리산 종주시 능선을 계속 걸으면서 ,지리산의 품속 그 계곡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차에

미리 선약된 피아골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지리산종주는,여기를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대략 13 km를 5시간안배한 산행계획이었으나 ,단풍의 절정기에 휴일이니 성삼재에 도착하니,좀 과장하여 인산인해다.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않고서,단풍을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피아골로 가는 듯하다.광주,대구,포항,울산
전국 각 지역에서 들이 닥치는 산행,행락 버스는 주차장이 좁아 도로변에 대기,우리도 성삼재 1km 전방 에서 하차 산행
개시...작년도 단풍 절정기에 내장산 산행길에 들었다 역시 주차장 진입 불가로 뜨거운 아스팔트길 7km를 걸은후 지쳐,
진작 산행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끔직한? 악몽이 되살아 나는듯하였으나,오늘은 약간 안개와 서늘한 가을 바람에
1km 정도 도로 산행이니,오히려 5시간 이나 좁은 버스칸에서 답답했던 심심을 적당히 워밍업하는것이 더 낫다.
 지난 5월 지리산 종주시 노고단을 bypass 하여 ,이 번엔 들리려 하였으나,짙은 운무와 너무 많은 산행객으로 또 생략하고,
부지런히 대간 능선길로 들었다.돼지령을 지나니,운무도 어는 정도 걷치고 남쪽의 지리산 봉우리가 자태를 나타내어 잠시
기록사진을 찍고 발재촉을 한다.성삼재부터 일열로 느러진 산행객은  피아골삼거리에 도착할때까지 계속 되었다.
 
 임걸령 대피소 400m 지점 삼거리에서 오른족으로 피아골 하산코스에 들다.하산 600 m 지점부터 붉게 물든
단풍이 제법 눈에 온다.하산 길에  한 등산객에게  피아골의 단풍상태가 좋으냐고 물으니 별로란다.하긴
한 동안 계속된 전국적인 가뭄에 단풍이 좋을리 없겠지만 ,피아골의 단풍이 유명하다니 한 번 던져본 질문이다.
 
 
대간 길에서 많이 보게되는 산죽 군락속에 단풍나무 한 구루가 펼치는 화색의 향연...일단의 산행객들이 저마다
증명 사진 찍는 곳이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함께 점심을 한 선도 구룹은 벌서 멀리 하산 하였는지 보이지 않는다.
 
 
 
 
 
 피아골,"흔히 피아골에 관해서는 6.25 직후 적과 아군, 즉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싸움터였기 때문에 피아골이지 않은가 하는
얘기도 있고, 피아골의 어감이 피를 많이 흘린 골짜기라는 연상을 심어주어서 그런지 6.25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의 격전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과거에 김진규, 노경희 주연의 반공영화 [피아골]이 나온 탓에 빨치산 소굴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는 보급문제의 곤란 등 때문에 실제로 피아골을 근거지로 삼았던 도(道)단위
 이상의 빨치산 부대는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에선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석주관(石柱關)싸움에서
 피아골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경상,전라의 길목인 천연의 요새 석주관에서 칠의사(七義士)가
이끄는 승병과 의병들이 왜병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숨졌는데 이때 의병들의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하여
피내골(血川谷)로 부르다 피아골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나 석주관이나 피내골은 피아골과 지역적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피아골이라는 말은 실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稷田谷)이라
하다가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며 지금도 피아골 입구에 직전리(稷田里)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펌)
 
 
 
 
 
 
 
 
 
 
 
 피아골 종녀촌의 기이한 전설 (펌)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 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녀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 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性神)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한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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