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24(수)오늘은 지리적으로 어느때 던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차일 피일 미루어 오던 서울 성곽 탐방길을 찾다.
지난주 남한 산성 성곽 길 탐방트래킹에이어 서울 성곽길 트래킹차 광화문 경유 창의문방향으로 향하는데, . 그러나 사실은 어제(3.23)혜화문 방향에서부터 서울 성곽을 따라 말바위 안내소까지 도착하니 ,이미 오후3시가 지나는 바람에 숙정문 경유~창의문으로 하산 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삼청공원 경유 ~북촌 한옥마을 ~인사동길을 경유하여 귀가하니,거창한 탐사준비도 아닌 가벼운 배낭 하나면 되는 산보정도의 탐방 길이라도 사전 정보수집을 소홀히 해서 생긴 차질이니 제 탓입니다.
암튼 ,오늘은 어제와 반대로 창의문에서 가파른 북악산 정상을 경유 숙정문까지 간후 컨디션과 시간고려 다시 북악정상~창의문으로 복귀 한 후 창의문에서 부터 시작하는 인왕산 성곽길을 탐방하면서 사직동으로 회귀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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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사적 제10호)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고,태조 4년(1395) 경복궁,종묘,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鄭道傳)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낙산(125m),남산(262m),인왕산(338m)를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이 방대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모두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였다.세종4년(1422)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고,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그러나, 1635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에 맺은 '삼전도 맹약(盟約)'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서울 성곽은 방치된 상태로놓아둘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근 70년 지난 1704년 숙종30년에 이르러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이 공사는 6년에 걸쳐 시행 되었고 서울 성곽이 정비되자 숙종은 이듬해인 재위 37년(1711)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여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 만 남게 되었다.(근거: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간행 서울성곽안내서)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뒤 멀리 북악산(백악산)정상과 오른편으로 혜화문방향으로 이어지는 산 등성으로 서울 성곽이 있다.
광화문에서 오늘의 서울성곽 탐방 기점 창의문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바라 본 인왕산 . 시간이 되면 오늘 중으로 인왕산 성곽 길도 탐방할 생각이지만 어떨지...
1.21 사태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추모동상옆에 위치한 청계천 발원지 안내석을 사이로 계단 몇 개 오르면 바로 창의문이다.
창의문(彰義門)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것을 받아 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17년(1741)이곳을 수축할 때였다.당시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 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 되었고,지금 창의문에는 인조 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걸려 있다.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있다.그리고 성문의 무지개 모양의 월단(月團)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딝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1210시 창의문 안내소 도착 신분확인 후 패찰 교부 착용 후 탐방 산행을 시작하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바라 본 인왕산 성곽 길 시작 점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북악산(백악산)정으로 오른는 코스는 계속 가파르기 때문에 노약자는 반대 편으로 부터 올라 창의문으로 하산 함이 좋을 듯하다.
첫 번째 쉼 터에서 인왕산과 북한산 전경을 각각 배경으로
멀리 족두리봉에서 시작하여 오른편으로 향로봉을 경유 비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 계절 별로 틈틈히 가져 보았던 북한산 산행 추억을 새롭게하다.
(북한산 종주기는 여기에---> http://blog.daum.net/jcha3/15853932 )
백악산 (342m)정상에서 바라 본 남산의 서울 타워
1249시 북악산 (백악산)정상 도착
청운대 부근 성벽에 "가경(嘉慶)九年(1804년) 甲子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敏),감관(監官)이동한(李東翰)변수(邊首)기술자 용성휘(龍聖輝)"라고 새겨져
공사 실명제의 기록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 가운데 정용도라고 한글로 표기된것의 내력은 ?
청운대 휴식터에서 서울 시내 광화문,남산일대를 zoom-in 하니
경복궁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시원하다.
1400시 말바위 안내소 도착 .어제 혜화문 방향으로 부터 이곳 까지 왔으나 탐방 마감시간인 15시가 경과되어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오늘 창의문 도착시까지도 이곳에 당도한후 다시 원점으로 회귀 인왕산 성곽길을 밟기를 내심 생각해 두었으나 ,이 틀 연이은 산행이라서 인지 피곤하여 와룡공원~성균관대~통일부~가회동 경유 인사동으로 발 길을 옮기다.
성균관대옆을 내려 오면서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서울시 종로구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담다
가회동 언덕길 에서
북촌 한옥마을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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