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일주

바다산바다 2010. 3. 19. 17:38

2010.3.17(수) 오늘은 당초 공심산우회와 함께한 영장산 날머리였던 이배재고개에서 시작하여 망덕산~검단산~청량산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도립공원 산행을계획하였지만,오후에 봄비가 예상되어 계획수정후,남한산성 성곽길 종주를 계획하다.

 

 서울에서 동남향으로 약24km 위치한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자리잡은 경기도 남한산성은 광주시,하남시,성남시에 걸쳐있으며 남한산성도립공원 면적은 36.4평방km,성의면적은2.3평방km 이다.남한산성은 백제시대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의 보고이다. .특히 웅장한 산세와 아름다운 계곡 그리고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생태계를 보존하고있는 민족 자존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남한산성하면 떠오르는 병자호란과 인조의 청나라에대한  삼전도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굴욕의 역사가 생각나는 곳이지만 ,가끔 남성대골프장에서 바라보던 남한산성을 그 역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걸어보기로 하였다.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이 강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음에도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치는바, 이것이 불만인 조선내 신하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 새로이 '인조'를 임금으로옹립 , "인조반정"을 꽤한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와 화친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되는데,이에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한다.

 1차적으로 쳐들어온 후금군은 대략 4만에서 5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것만해도 당시 조선은 막아낼 수가 없었지만, 명나라를 의식한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兄弟)관계만 맺고 돌아간다. 그리고 몇년 후 세력이 커진 후금은 이미 약골로 전락한 명나라군을  짓밟은 후에,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하여 ,즉 후금이 왕이고 조선이 신하를 하라는 것인데, 조선왕조는 이를 거부하고,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하게된다.

 

 이것에 분노한 홍타이치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에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이에 청군은 본국에서 증원한 4만명의 군대를 더해 20만대군으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강화도로 도망쳤던 왕비와 세자등을  잡아와, 남한산성앞에서 조선왕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남한산성안에는 만 3천명의 군사와 한달분의 식량밖에 없었다. 모든면에서 절망적인 인조는 항복할 뜻을 표시한다

 

1월 30일 인조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출성을 재촉하자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삼전도에 단을 쌓고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서 항복의 예를 행한 후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역사는 되풀이 되지않으라는 보장이없다.평소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으로 국제정치,국방력강화등으로 현대판 굴욕과 치욕의역사가 반복되지않게 국민모두가 각성하고 있을 일이다.   


 

(남한산성 역사관내 설명자막 중 ...백데시대는 백제시대로 바로잡습니다^-^)


 8호선 남한산성입구에서 남문(지화문)행 #9 버스를 이용 남문도착시간은1055시 .

남문(지화문)~서문(우익문)~북문(전승문)~동문(좌익문)순으로 탐방하기로하고,

기상과 시간고려 외부의 옹성을 답사하기로하고 출발하다

 

 

 

 

 

 

 성곽을 왼편으로 두고 계속가기만 하면되는 편한 길이나 가끔 경사계단 길도 있다

왼편 아래 지나온 성남시를 줌인(zoom-in)해보다.

 

 

 

 

남한산성의 소나무는 수도권 최대의 자연생태계를 보존

   

 가끔식 눈에띄는 훼손된 성벽이 손길을 기다린다.  

 

 

  

 

 

 영춘정(팔각정)안내석

 

 

 

  

 

 청량당과 수어장대을 외부에서 바라본 모습

 사형제존폐를 두고 논란이 많은 작금,이회의 죽음은 정확한 법집행의 반면교사라 할수있을것이다.

  

 

  

 

 

 

 

 

 

 

 

 

 

 서문(우익문).오랑캐 청에 항복을 하기위하여 인조가 통과하여 삼전도로향하였다는 그 문

 

 

 

 

 

 

 

  서문밖에서연주봉오성을 향하던 중  남성대골프장과 서울시 강남지구를 배경으로

 

 

 

  

연주봉옹성에서 바라본 검단산 방향

 

 

 

 연주봉옹성에서 바라본 금암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선과 오른편 하남시

   

  

  이곳은 자연재해 현장이라하기보다는 인재의 현장,너무나 많은 越城客 !

길이 아닌 곳으로 특히 담 넘어 다니지 맙시다   

 

 

 펑퍼짐한것이  홀마다 비슷비슷하지만 별로 스코어는 안나오는 남성대골프장의 fair way

 

 멀리 강북의 북한산의 연봉실루엣이 연무에 아련하다

 

 

  

 

1337시 북장대지 도착 15분 휴식

 

 

 

 

1356시 북문(전승문)도착

 

  

 

 

 

 

 

 

 

 

 

 

 

 

 

 

 

 

 남한산성 4대문 종주중 경사가 가장급한 북문~동장대지 중간지점 계단 길을 올라  

 이 암문을 통과하여 봉암성을 둘러 볼수있으나 ,미련을 두고 떠나야

나뭇잎 푸르러질 때 다시 오게되니오늘은 생략 하기로 하다.

 

 

 

 

 

  

 

 

장경사신지옹성을 향하여 내려가는 길목에 산새 한마리 계속

노래를 하여 동영상에 담다. 

 

운치있는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저아래 왼편으로 틔어나온 곳이 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 대웅전이 석탑뒤로

 

 

 

 

 

 

 

 

 

 

 

  1531시 드디어 동문(좌익문)도착 (남문 출발후 4시간 36분 소요)

 

 

 

  

 

 

 

 

   

  아무리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는 말 "유비무환" 을 몇 번이고 반추케하는

남한산성성곽일주  트레킹은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다.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은

필히 산성내 문화유산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한 해설 프로그램도 있으니 강추. 

(인터넷 사전예약제:www.ggnhs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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