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토크

有我無蛙 人生之恨(서울고13회홈피에서 펌)

바다산바다 2010. 10. 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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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란 뜻이다.

    고려 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규보가 몇 번의 과거에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살 때 집 대문에 써붙였던 글이다.

    이 글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임금이 하루는 단독야행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했지만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임금은 할 수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집(이규보)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만큼의 지식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도저히 감이 안잡혔다. 주막에가서 국밥을 한그릇 시켜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집(이규보집)에 대해 물어 봤지만, 과거에 낙방하고 마을에도 잘 안나오고 집안에서 책만 읽으며 살아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사정 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 해서 면담을 신청했다.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3일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두루미를 심판으로 하고서.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하기는 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에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두루미한테 갖다 주고 뒤를 부탁한 거다.

    약속한 3일이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곡씩 부르고 심판인 두루미의 판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두루미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말은, 이규보 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이규보 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실력이나 지식은 어디 내놔도 안 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거다. 돈이없고, 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두루미한테 상납한 개구리같은 뒷 거래가 없었기에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이규보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하기에, 자신도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인데 며칠 후에 임시과거가 있다해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임시과거를 열것을 명하였다 한다.

    과거를 보는 날, 이규보 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 걸은 시제가 '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여덟자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 급제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펌)


 

이 규보 (李 奎報)

본관 여주. 자 춘경(). 호 백운거사()·지헌()·삼혹호선생(). 초명 인저(氐). 시호 문순(). 1189년(명종 19) 사마시(),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에 의해 권보직한림()으로 발탁, 참군사()·사재승(우정언()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한림시강학사()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가 되었으나, 팔관회()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祕)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殿정당문학(참지정사()·태자소부()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태자대보()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에 〈천마산시()〉 〈모중서회()〉 〈고시십팔운()〉 〈초입한림시()〉 〈공작()〉 〈재입옥당시()〉 〈초배정언시()〉 〈동명왕편()〉, 문()에 〈모정기()〉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 등이 있다.

 

 

 

위는 까마귀가 두루미에게 개구리를 뇌물로 바치는 얘기인데 이규보가 뇌물에 관해서 쓴 "주뢰설舟賂說 (뱃사공에게 뇌물 주는 얘기)"이라는 단문에서  자신은 비록 재물이 없어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벼슬하고 있는 자들은 실력보다도 재물을 이용한 부당한 방법을 통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임을 강조한다.

 

"주뢰설(舟賂說) 
 이규보(李奎報)

"이자(李子, 이규보)가 남쪽으로 어떤 강을 건너가는데, 배를 나란히 하고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두 배의 크기도 같고, 사공의 수도 같으며, 타고 있는 사람과 말의 수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보니, 그 배는 떠나 가기를 나는 듯이 달아나서 벌써 저쪽에 닿았는데, 내가 탄 배는 오히려 머뭇머뭇하며 전진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저 배에는 사공에게 술을 먹여서 사공이 힘을 다하여 저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는 부끄러운 빛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탄식하기를, “이 조그마한 갈대 잎과 같은 배가 가는 데에도 오히려 뇌물이 있고 없는데 따라 빠르고 느리며 앞서고 뒤서는 것이거늘, 하물며 벼슬길에서 경쟁하는 마당에 있어서 내 손에 돈이 없었으니, 오늘날까지 하급 관리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 하였다 .기록하여 두었다가 다른 날에 참고로 삼으려 한다"

 

 

뇌물 줄 돈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양은 같다.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顧吾手無金 宜乎至今未霑一命也

"내 손에 돈이 없는 걸 생각하니 오늘날까지 하급 관리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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