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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규보 (李 奎報)
본관 여주.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祕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에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위는 까마귀가 두루미에게 개구리를 뇌물로 바치는 얘기인데 이규보가 뇌물에 관해서 쓴 "주뢰설舟賂說 (뱃사공에게 뇌물 주는 얘기)"이라는 단문에서 자신은 비록 재물이 없어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벼슬하고 있는 자들은 실력보다도 재물을 이용한 부당한 방법을 통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임을 강조한다.
"주뢰설(舟賂說)
이규보(李奎報)
"이자(李子, 이규보)가 남쪽으로 어떤 강을 건너가는데, 배를 나란히 하고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두 배의 크기도 같고, 사공의 수도 같으며, 타고 있는 사람과 말의 수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보니, 그 배는 떠나 가기를 나는 듯이 달아나서 벌써 저쪽에 닿았는데, 내가 탄 배는 오히려 머뭇머뭇하며 전진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저 배에는 사공에게 술을 먹여서 사공이 힘을 다하여 저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는 부끄러운 빛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탄식하기를, “이 조그마한 갈대 잎과 같은 배가 가는 데에도 오히려 뇌물이 있고 없는데 따라 빠르고 느리며 앞서고 뒤서는 것이거늘, 하물며 벼슬길에서 경쟁하는 마당에 있어서 내 손에 돈이 없었으니, 오늘날까지 하급 관리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 하였다 .기록하여 두었다가 다른 날에 참고로 삼으려 한다"
뇌물 줄 돈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양은 같다.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顧吾手無金 宜乎至今未霑一命也
"내 손에 돈이 없는 걸 생각하니 오늘날까지 하급 관리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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