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산행(2010.11.28)_동영상합철비교수정보완함

바다산바다 2010. 11. 29. 17:09


 
2010.11.28(일) 겨울을 재촉하는 어제의 비와 강풍으로 금년중 제일 춥다는 오늘, 하늘은 높고 청명하니


오히려 산행에는 최적이다. 주섬 주섬 배낭을 꾸려 북한산성 입구로 향하다. 북한산 둘레길 40 km를 종주
하면서 종주가 끝나면 틀림없이 백운대 정상에서의 감회가 다를것이란 생각에 다음
산행지는 백운대로 하겠다는  생각대로 나서다.
 
 전철이 한강다리를 넘기시작하면 나의 대용 필기 도구인 디카를 작동하여그 날의 일기 상태와
 카메라 작동 상태를 재차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북한동 마을 정비사업계획의 일환으로 북한산성 입구의 신축 상가 건물들이 그 간 하나 둘씩 완공 입주하더니
어느덧 산뜻한 상가타운으로 변모해있다.  바라건대 이들 이 떠난 북한동 마을의 생태 복원도 상가타운완성 속도로
빨리 진행되었으면 좋으련만 ...
 
잎이 떨어진 겨울산 산행의 잇점은  멀리 산봉오리 와 능선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일듯 말듯하던 여름산행과 달리
훤히 그 모습을 내보이니 좋다. 등산로를 따라 가면서 계속 오른 편으로 원효봉,염초봉,백운대,만경대,노적봉이
다가오고  의상봉이 오른편 뒤로 멀어진다.


 
(아래 동영상은 2개를 동시play 하여도 스트리밍은 원활함)  


추가 사족과 사진은 여기에...CLICK








 
 
 
 
 
 
 
 
 
 
 
 
 
 
 
대서문은 사실상 북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다른 문들은 산 위로 올라간 곳에 세운 반면 대서문은
구파발로부터 평지를 따라 접근할 수 있었기에 옛사람들의 북한산 통로는 대부분 대서문으로 통했다.

숙종(肅宗) 37년(1711년)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소로가 뚫렸고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당시 경기지사 최헌길(崔獻吉) 씨가 미군 불도저를 동원하여 5m 폭의 길을 냈다고 한다.
이 길을 기반으로 해서 그 후 길이 넓혀지고 북한동 산성마을까지 포장이 되었다.
 
일제 때 홍예(虹霓: 문 아래 석물로 무지개처럼 된 부분)만 남고 문루(門樓: 나무와 기와로 만든 건축 부분)는
멸실되었던 것을, 최헌길 지사가 1958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서문이라고 쓴 편액(扁額)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다.
(이상은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에서 펌)
 
용머리 누혈(漏穴: 빗물 빠지는 곳)을 보면 용의 입으로 물이 빠져 나가게 만든 수작임을 알 수 있다.
  
 
 
 
 
 
 
  
 
 
  
 
 
 
 
 
대서문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무량사(無量寺)란 절이 나온다. 이 절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 공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가 100일 기도하여 영친왕을 잉태한 원찰(願刹)이다.
조선의 슬픈 멸망사를 이 절은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무량사를 지나 10분이 안 되어 북한동(北漢洞, 과거의 북한리) 마을에 도착한다.
 파전, 빈대떡, 막걸리 냄새가 가득 찼던 이곳은 이제 상가가 모두 아래로 떠나고 한두 집만이 마지막 산객을 맞고 있다.

이곳 북한산성 마을은 참으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4대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
 춘이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春二月 築北漢山城)는 기록이 있고, 23대 개로왕(蓋鹵王) 15년 10월에는
병사를 나누어 북한산성을 지키게 했다(冬 十月, 分北漢山城士卒戍之)고 기록됐다.

또한 고려의 최영 장군도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를 이곳에서 했으니 마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군인들의 처자권속이 거처했을 것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시작되고 삼군영(三軍營: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들이
상주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백제나 고려를 제외하더라도 3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인 것이다.

이제 국립공원 내의 환경보호를 위해 이 곳 마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아래 북한산성 입구로 이주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인 것을 알면서도 300년 된 마을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북한동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병이 강제 해산되자 사찰들의 폐사됐고, 1907년 이곳에 주둔하던
삼군영의 병사들이 일제에 의해 쫓겨나면서 더욱 피폐해졌다.

한 술 더 떠 의병의 근거지가 될 만한 건물은 모두 파괴하고 일본 헌병까지 이곳에 주둔하였다.
 하늘도 무심해 1915년 홍수에 이어, 1925년 을축년 대홍수까지 겹쳐 북한산성과 북한동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쓸 만한 건물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주민들은 어려움을 딛고 윗마을 40가구, 아랫마을 40가구가 농사짓고, 나무해다 팔고 살았다는데
6.25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초토화되었다. 1.4후퇴 당시 중공군이 몰려오자 UN군은 방어라인을 수색, 연희고개,
녹번에 구축했는데, 텅 빈 북한산성에 인민군들이 진을 치자 연합군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1,000 명이 넘는
 인민군이 죽거나 부상당한 치열한 전투지역이기도 했다.

다행히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원효봉 상운사에 기거한 인연이 있었다 한다. 그뿐인가? 그 어머니는 문수봉 아래 문수사(文殊寺)에서
100일 기도한 후 이승만을 낳았으니 이승만 대통령이야 말로 북한산의 아들인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주민들을 위해 관광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한다.
그런데 4.19로 하야하자 이곳 주민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이때부터 놀이객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
북한동의 파전, 도토리묵, 막걸리 장사의 시작이었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마지막 55가구가 곧 이주한다고 한다. 북한동 마을은 이제 파란만장한 세월을 접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지친 다리로 산에서 내려오면 파전,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팔고
산성입구까지 봉고차로 날라 주던 북한동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상은 이한성의 이야기가있는 길에서 펌)

 
 
 
 
 
 
 
북한동 마을 정비구역에 새로 등장한 삼각산 전망대에서
왼편으로부터 바라보는 원효봉 염초봉,백운대 ,만경대,노적봉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버티어 선 소나무의 강인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시사하고있다.
 
 
 
 
  
 
 
 
 
 
 
 
 
위문이 바라보이는 8부능선에서 갑자기 등뒤에서 바리톤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 보니 Dr.Lee 가  동생등과 함께 이미 백운대 등정을 마치고 내려오다 조우하다.
이산가족 상봉같은 감회였으나 갈길이 서로 바쁜 핑계로 사진한잔 박고 헤어지다.
 
 
 
 
 
 
 
 
 
 
 
 
 
 
 
 
 
 
 
 
 
백운대 정상에서
같은 정상이건만  북한산 둘레길 40km를 종주하기 전과 후의 백운대 정상에서
느끼는 감회는 서로 다름을 느끼다.정상에서의 시간을 여유있게 하고 싶지만 랜턴도
준비하여 왔지만  일몰전 1시간 반 서둘러 하산채비를 하다.